[프랑스문화기행]베르사유 궁전, 그 의미를 찾아 떠난 여행
유럽의 높고 웅장한 건축물은 군주의 권위를 상징하는 것으로 유명하다. 하늘 높이 치솟은 교회의 첨탑, 수십 미터 높이의 웅장하고 화려한 돔, 건물 구석구석에서 눈길을 사로잡는 조각과 벽화, 형형색색의 스테인드글라스, 그리고 돔 천장과 스테인드글라스를 통해 들어온 빛이 모이는 금빛재단 등의 정교한 건축물을 보노라면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1662년 공사를 시작해 50여 년 만에 완성된 베르사유 궁전은 세계에서 가장 큰 궁전 중의 하나이다. 베르사유 궁전은 프랑스혁명의 기폭제를 제공한 곳이기도 하다. 한참 공사가 진행 중일 때는 3만명의 백성이 무보수로 노동을 했기 때문에 굶주린 백성에게 분노의 대상이었다고 한다. 사실 베르사유궁전이 지어진 이유부터가 잘 못 끼워진 첫단추였다. 루이 14세가 재무장관인 푸케의 집에 초대받아 갔는데 너무나 잘 지어진 푸케의 저택에 자존심이 상해 훨씬 더 웅장한 성을 짓겠다는 욕심으로 만들어진 것이었다고 한다. 뿐만 아니라 루이 14세는 푸케를 불법으로 돈을 모았다고 단정해 평생을 옥에 가두었다고 한다.
타고난 예술가, 건축가, 조각가, 원예가, 공예가들을 총동원하고 백성들이 무리하게 동원된 베르사유궁전은 1789년 왕정을 타도하는 프랑스 대혁명이 일어나게 된 중요한 요인으로 작용했다. 뒤이어 1830년의 시민혁명과 유럽혁명의 해인 1848년에 전 유럽에 불길처럼 번진 시민들의 저항으로 왕권은 더욱 흔들리게 되었다.
유럽을 호령하던 왕들의 시대는 이젠 갔다. 대신 당시의 영화를 떠올리게 해주는 화려했던 궁전들만 남아 세계 각지의 관광객을 맞이하고 있다. 지금도 여러 나라들이 군주제를 채택하고 있다. 하지만 살아남은 왕들은 정치적 역할보다는 국민들 사기진작이나 국빈 접대와 같은 장식적 역할을 초라하게 맡고 있을 뿐이다.
(방진하 기자, 청년한선기자단 1기)